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를린 공방전 (문단 편집) == 전투 == [[파일:Berlin3.jpg]] 나이 어린 [[국민돌격대]] 소속 대원과 악수하는 베를린의 국민척탄병과 국민돌격대의 최고 총사령관이자 제3제국의 수장 [[파울 요제프 괴벨스]]. 독일군은 병력 대부분이 소년과 중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즈음엔 독일 전역에서 젊은 남성들이 거의 전부 동원된 상태라 [[징병]] 연령이 15~60세라는 막장으로 치달았다.[* <[[월드 앳 워]]>에서 [[레즈노프]]의 입을 빌어 '''어린 놈, 늙은 놈, 병든 놈'''까지 끌고 왔다며 이를 [[조소]]한다. 철십자의 각 부분에 그 셋이 각각 배치되는 디자인도 볼 만하다.] 3개월 간의 대규모 공세를 성공적으로 끝마친 4월, 스탈린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게오르기 주코프]], [[이반 코네프]] 등 전선군 사령관들을 모스크바로 소집해 베를린 공략에 대해 논의했다. 모든 사령관들이 역사에 길이 남을 베를린 공략을 맡고 싶어했지만, 스탈린은 특정 사령관에게 베를린 공략을 맡긴다고 하지 않은채 >"베를린에 제일 먼저 도착하는 전선군이 베를린 공략을 맡을 것이다." 라고만 이야기했다. 이 때문에 전선군 사령관들은 회의를 마치자마자 자신들의 사령부로 돌아가 부하들을 닦달하며 이 경쟁에서 이길 생각만 했다. 베를린 주위에 포진한 소련군은 3개 전선군으로 구성되었고 병력은 약 250만 명, 전차 6,250대, 전술기 7,500대, 각종 야포 40,000문 등 많은 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는 독일군 수비대는 70만 명의 병력과 1,519대의 AFV[* Armoured fighting vehicle. 전차, [[구축전차]], [[돌격포]], [[장갑차]] 등 장갑을 두른 모든 차량 및 전차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당시 독일군 수중에 남아 있었던 모든 전투차량이라는 것이다.) 독일군은 1945년 3월 [[봄의 새싹 작전]]에서 상당수의 남은 전차, 구축전차, 돌격포를 상실했기 때문에 이 1,519대의 AFV 상당수는 장갑차였을 것으로 보인다.], 2,000여 대의 전투기, 9,000문의 야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모든 분야에서 3:1 ~ 4:1의 전력 차이가 나고 있었고, 그나마 저 독일군 병력 수치도 전부 멀쩡한 병력은 아니고 움직일 수 있는 부상자, 병자, 지상 전투에 숙달이 덜 된 독일 해군과 독일 공군에서 차출한 병력, 그보다도 못한 전투 경험이 부족하거나 전무한 [[국민돌격대]]와 [[히틀러 유겐트]]의 소년병까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소련군에 수적으로뿐만 아니라 질적에서도 확실한 열세를 보이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서방 연합군이 담당한 서부전선에서도 연합군이 베를린 방면으로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 그래도 적은 병력을 서부전선으로 돌렸다가 동부전선으로 복귀시키는 힘든 작업을 수행해야 했다. 한편 독일군 사령부는 [[서부전선]]에 마지막으로 남은 병력조차 베를린으로 데려오라고 시도했다. 대표적으로 [[아돌프 히틀러]]는 서부전선의 [[엘베 강]] 방면을 담당하고 있었던 [[발터 벵크]] 장군과 그가 지휘하던 제12군[* 사실상 대전 말기, 북부 독일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된 전력을 갖추고 있었던 군단이었다.]에게 [[베를린]]을 구원하라고 명령했다. 벵크와 12군은 어찌어찌 포츠담까지는 진격해서 소련군을 격파했지만, 서부에서 미군의 뒷치기를 우려한 벵크가 12군을 다시 서부전선으로 보내버리면서 12군의 베를린 구원은 없던 일이 되었다. 이 사실을 들은 히틀러는 분노하면서 벵크에게 베를린 구원을 지속적으로 명령했으나, 벵크는 >'''더 이상 [[아돌프 히틀러|한 개인]]의 운명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라고 말한 뒤 그대로 씹었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이후 12군의 병력들은 제9군과 연합해서 독일 민간인들과 부상병들을 탈출시키는 엘베 강 방어 작전에 투입되었다. [[파일:Berlin4.jpg]] 베를린 전투에서 사로잡힌 독일군 포로들. 군복을 보면 왼쪽의 2명은 독일 공군 소속[* 공군 특유의 카라장과 가슴 부분에 독일 육군과는 다른 날개를 접은 형태의 독수리 오버로크가 박혀 있음을 통해 공군소속임을 알 수 있다.]이고, 그 옆의 2명은 독일 해군 수병[* 밑단이 짧은 네이비 블루 색상의 수병용 [[피코트]]를 입고 있다.]임을 확인할 수 있는데, 실제로 베를린 전투에는 1,000여 명의 해군을 포함해 꽤 많은 수의 해•공군 인원들이 방어 전투에 육전대로 투입되었다.[* 이 때 독일 해군은 사실상 전멸했다. 또는 군함을 버리고 후퇴해서 민간인인 척 하며 육군에 입대하는 인간들도 있었다.] 위 사진처럼 몇 명이 개별적으로 투입되는건 예사였고, 실제로는 많으면 1, 2개 사단이 해•공군이라는 이름만 남기고 통째로 육군으로 전군되는 경우가 흔했다. 저렇게 전군된 병력들은 대부분 육군측 장교의 지휘를 받았지만, 막판에는 장교 숫자 자체가 매우 부족해졌기에 해•공군에서 할 일이 없어진, 육상전과는 전혀 관계없는 장교들까지 끌어와서는[* 일례로 해군은 아예 후방에서 교관으로 활동중이었던 '''유보트 에이스'''들을 데려와서 부대의 대대장을 맡길 정도였다(...). 물론 당시 나치 독일은 국민돌격대 지휘관 자리에 소방관이나 경찰을 임명하는 정도까지 갔기 때문에 이상할 건 없다. 이들이 다 못 싸운 건 아니고, 전후에 되니츠 제독의 경호부대역까지 맡은 U-333의 함장인 잠수함 에이스 페터 크레머 소령이 이끄는 잠수함 승조원으로 편성된 해군 대전차대대는 종전 직전 [[판처파우스트]] 등을 써서 전차가 포함된 [[영국 육군]] 병력을 피해 없이 격퇴시키도 했다.] 지휘를 맡기고는 했다. [[파일:베를린 국민돌격대.jpg|width=600]] 참호에서 [[판처파우스트]]로 무장한 국민돌격대 대원들. 저 대원들이 쓰고 있는 군모는 독일 공군의 사병용 전투모[* 근무모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저 개리슨모 형태의 모자는 엄연히 전투시 철모를 미착용할 경우 쓰게 되어 있는 전투모다. 육군은 전투모, 해군은 함상모, 공군은 비행모라 불렀다. M43이라 불리는 챙과 귀덮개가 달린 모자를 전투모, 개리슨모 형태의 모자를 근무모로 혼동하는 이들이 있으나, M43 전투모는 기존 개리슨형 전투모의 대체품이지 전혀 다른 개념의 모자가 아니다.]인데, 당시 워낙 물자가 부족했기에 아무 군복이나 국민돌격대에게 쥐어 주었던 것이 일상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